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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접시꽃 당신 - 도종환

ehkoang은희광 2008. 6. 30. 19:38

 

♧ 2008년 6월 28일 토요일 장맛비


5월부터 시작하여 매주 토요일에 갖는 오름 강좌를 쉬는 날인데도

지난주에 큰비로 거린악에 가지 못한 산행을 약속한 터라

토요일에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마전선이 한반도 중심으로 올라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평일에는 개었다가 심술을 부리듯 주말에만 오는 비가

멈춰 줄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월라봉에 있는 감귤박물관에 가서

관람을 하면서 비가 오는 추이를 지켜보고 산행을 결정하기로 하고,

중산간도로를 통해 이동하는데 마침 자배봉 옆에서 비가 멈춘다.


우리는 거린악과 비교적 가까운 이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서 거린악 산행을 결정

하기로 하고는 차를 세우고 우비를 착용하여 산으로 올랐다. 생각보다도 훨씬 큰

자배봉은 산책로가 잘 되어 있어 무난하게 올라 시계방향으로 능선을 한 바퀴

돌고 정상과 트인 곳에서 이 자배봉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였다.


오름에서 내려오는데 기다렸다는 듯 다시 큰비가 온다. 이젠 처음 결정한 대로 감귤박물관에

가기로 하고 계속 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는 거기서 비를 기다리며 구경하다가

시간이 꽤 되었는데도 비가 그치지 않자 산책로가 있는 월라봉도 못 오른 채 차를 돌려

보목리로 가 해녀음식점에서 자리물회를 먹고 제지기오름만 오른 후 돌아왔다.

 

 

♧ 접시꽃 당신 -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읍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둥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어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출처 : 접시꽃 당신 - 도종환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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