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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뜰보리수, 알알이 익어가는

ehkoang은희광 2008. 6. 30. 19:35

 

♧ 2008년 6월 24일 화요일 비


정말 장마다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 나날들이다.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하는 칙칙함이 술을 부른다.

그런 중에 다시 추자도를 경유하는 선박 편에 대한 황당한 소식이 들려온다.

제주를 출발하여 추자도와 진도를 경유, 목포를 왕복하는 핑크돌핀호가 수리하러 들어갔다.


꼭 4년 전 비슷한 일이 다시 일어날까 염려하면서도 7월20일 80명을 예약했다.

추자도에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한일카페리 3호와 핑크돌핀호를 이용하는 길.

한일카페리 3호는 제주항에서 13:40 출발, 2시간 소요 15:40에 하추자항에 도착하고

하추자항에서 10:30에 출발, 제주항에 12:30에 도착하기 때문에 하룻밤을 묵드라도

답사다운 답사를 하지 못한다. 그 많은 인원이 자고 먹는 것도 부담이다.

 

그러나 이번 수리 들어간 쾌속선 핑크돌핀호는 제주항에서 09:30 출발하여 55분

걸려 10:25에 상추자항에 도착하고, 상추자항에서 16:25에 출발 제주항에 17:20에

도착하기 때문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6시간 동안 섬을 돌며 살펴볼 수 있다.

4년 전에도 두 번이나 답사하려고 배를 예약했는데, 수리 들어가 영영 안 나왔었다. 

   

뜰보리수는 녹비늘보리수나무라고도 불리는 일본 원산의 정원수로 알려져 있다.

쌍떡잎식물 도금양목 보리수나무과의 낙엽관목으로 2-4m 정도 자라는데

꽃은 연한 황색이며 다소 떫지만 식용하는데, 한방에서는 열매를 목반하(木半夏)라 하여

혈액 순환을 개선시키고 타박상, 기관지천식, 치질 치료에 쓰고 있다.

 

 

♣ 보리수나무 아래로 - 김승희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무 아래 길이 있을까,

난 그런 것을 잊어버렸어,

아니, 차라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정직하겠지,

잊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것을 쉽게 되찾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시간 속에 종종 성냥불을 그어보지,

내가 잃어버린 무슨 나무 아래 길이

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혹시 장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

물푸레나무 아래 휘어진 히아신스 꽃길이

어디 어둠의 담 저 너머

흔적 같은 향기로

날 부르러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난 청춘을 졸업한 게

아니라

청춘을 중퇴한 듯해.

청춘에서 휴학하고 있는 듯한

그래서 곧 청춘에 복학해야 할 듯한

그런 위태로운 아편 길 위에서

난 정말 미친 듯이 뛰었지. 아, 그래

정말이야, 꼭 미친 듯이 뛰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어.

 

 

그래서 난 새해같은 것이 오면

더욱 피로해지는 것 같아.

그런 시간에는 문득 멈춰 서서

자신을 봐야 하니까.

누구의 삶에나 실수는 있는 법이고

갑자기 자신을 본다는 건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지.


「쓰러질 것 같아요」

「용기를 내」

「아직도 멀었을까?……」

쓰러질 것 같아서

시간의 문지방을 베고 누우면

그래, 그래, 그런 착한 깨달음이 오지.

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

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은

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보리수 아래 길을 걸은 것이라고.


이제야 비로소 난

모든 사람의 길과 나 자신의 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듯하다.

모든 길이란, 아마도, 나,

자신의 보리수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므로.

 

 

♣ 보리수 밑을 그냥 지나치다 - 한혜영 

 

가로등 너는 아득한 전생에 

보리수나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뜨거운 발등 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석가를 물끄러미 굽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고요히 흘러넘치는 그의 뇌수를

딱 한 방울 맛본 힘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모를 일이다


가로등 황금열매가 실하게 익어 가는 밤

설령 네가 그 날의 보리수였다고 해도

기대하지는 마라

이 시대에 누가 네 앞에 가부좌를 틀고

부처가 되려고 하겠느냐?

너를 붙들고 오열하다가 발등

왈칵 더럽히는 석가들이 있을 뿐,

어쩌다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 가는 중생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전생에 너를 몰라보고 끄덕끄덕

보리수 밑을 찾아가는 중일 것이다

 

 

♣ 보리수 - 김종제


비로자나 석불 옆에

보리수 열매 붉디붉다 못해

발아래 우수수 떨어져 밟혔다

고요한 대낮이다

피할 그늘 없는 대명의 천지다 

무량겁해 밝히는 불덩어리라서

지상으로 드러낸 얼굴마다

송글송글 이슬이 맺혔다

앗, 뜨거워라 불(佛)이여

들썩거리는 어깨하며

후들거리는 무릎하며

실룩거리며 떨리는 눈꺼플하며

껍질째 공양으로 드렸으니

불붙어서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폐허에 사리 몇 개 남아서

떼구루루 불(佛) 앞까지 굴러와

불같은 화두를 던지는데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에서

머리에 후두둑 떨어지는 저것

빗줄기에 휩쓸려가는 저것

온몸의 구멍 밖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가는 저것으로

등골이 서늘하다 

한 철 불에 잘 그슬렸으니

생의 첫 맛이 달콤하게 익어서

보리수 열매 삼키지 못하고

늙은 애비처럼 우물거리고 있다

 

 

♣ 보리수 - 김참


 나는 많은 꿈을 꾸었다.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따가운 햇살 받으며, 나는 너무 많은 꿈을 꾸었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하얀 옷을 입은 여자들이 커다란 파이프가 달린 오르간의 뚜껑을 열고 내 노래에 맞춰 건반을 눌렀다. 내 노래는 바람을 타고 분꽃이 가득 핀 마을 어귀를 지나, 안개 낀 붉은 벽돌의 거리와 옻칠한 가구들을 늘어놓은 은사시나무 강 언덕을 따라 사라졌다. 은사시나무 강 언덕에 앉아 나는 너무 많은 꿈을 꾸었다. 검은 옷을 입은 유령들은 내 노래가 사라진 안개 낀 붉은 벽돌의 거리를 쏘다니며 어릴 적 내가 부르던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하얀 옷 입은 여자들은 보리수나무 그늘에 놓여있는 커다란 파이프오르간 뚜껑을 닫고 길쭉길쭉한 나무들이 서 있는 은사시나무 강 옆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많은 꿈을 꾸었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기차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내가 잠든 보리수나무 옆을 지나가는데, 총을 든 군인들이 은사시나무 강 언덕을 지나 내가 잠든 보리수나무 옆을 지나가는데, 나는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따가운 햇살 받으며 너무 많은 꿈을 꾸었다.

 

 

♬ Whispering Hope(희망의속삭임) - Anne Murray

 

출처 : 뜰보리수, 알알이 익어가는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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