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의무릇
컴퓨터가 좀 오래되어 굼뜨고 잡음이 많이 나는 걸 안
큰애 내외가 생일 기념이라면서 새 걸로 바꿔주는 바람에
포토샵도 지워지고 묵은 하드에 들어있는 그림이
양이 많아 아직 옮겨지지 않은 상태여서 비상수단을 썼다.
다른 해 같으면 제주에 이미 피어있었을 꽃들을
하루 빨리 만나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작년에 올렸던 것에서 뽑아 싣는다.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지 너무 반갑다.
새봄을 맞아 펴낸 ‘우리詩’ 3월호는 봄향기로 넘쳐난다.
‘권두시론’으로는 복효근 시인의 ‘진실한가? 독창적인가?’를 실었고
정예 시조시인 6인 특집으로 윤금초 김영재 박기섭 정경화 이승현 이민아의 시조를
신작 소시집으로 홍해리 시인의 ‘귀북은 줄창 우네’외 5편을 실었다.
‘우리詩’가 선정한 이달의 시는 최기순 최금진 고성만 최정란 이지담의 작품을
‘이 시, 나는 이렇게 썼다’로는 김금용 시인의 ‘고 김강태 시인과 시「광화문 쟈콥」’,
‘신작 특집’으로는 배경숙 송문헌 박정래 김민형 조성심 윤석주 윤정옥 등의 작품,
그 외로 영시 소개, 중국시 소개, 우리詩 월평, 시집 서평 등으로 구성되었다.
* 현호색
♧ 새봄의 기도 - 박희진
이 봄엔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내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 속의
벌레들마저 눈뜨게 하옵소서.
이제사 풀리는 하늘의 아지랑이,
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
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
새 소리, 물소리에
귀는 열리게 나팔꽃인 양,
그리고 죽음의 못물이던
이 눈엔 생기를, 가슴엔 사랑을
불붙게 하옵소서.
* 흰광대나물
♧ 어둠의 힘 - 홍해리
어둠이 빛인 줄 안다면
세상을 밝히는 것은 빛이 아니라
빛의 밝은 힘이 아니라
어둠의 힘이라는 걸 알게 되리
나무도
하늘 가까이 가는 것은 우듬지이지
우듬지에 별이 걸리고
별이 너를 비춰주고 있지만
결국 하늘에 가 닿는 것은
우듬지가 아니라 뿌리다
뿌리가 나무로 들어가
우듬지를 곧추세워야, 비로소
나무는 하늘에 닿는다
그러니 하늘에 닿는 건 뿌리다
뿌리의 힘이다.
* 자주괴불주머니
♧ 푸른 반점 - 고성만
사내는 딸의 몸에서 반점을 발견하자마자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 날카롭게 빛나는 사금파리를 주은 다음 우물가에 데리고 가 샅샅이 씻겼지만 지워지지 않는 얼룩
꼬리뼈 지나 허벅지로 기어간 줄장지뱀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출발하여 아무르 강가를 따라 내려오다가 오줌 한 번 누고 몇 개의 구릉과 골짜기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잠시 소스라쳤으나 셋째딸년의 몸에 난 얼룩을 수습하지 못했다
다섯 번째 낳은 아들 쪽으로 무게의 추가 기울었으므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온몸을 돌아 입으로 들어간 얼룩이 마침내 내장 전체로 번질 때까지 아장아장 앙증맞은 딸년을 돼지우리 속에 가두고 사는 게 죄악이라고 중얼거렸다 병든 피톨이 집 안팎을 휘젓는 동안 또 다른 자식에게 난 반점을 찾으려 눈을 부릅뜨는 그는
아무르 강의 얼굴을 만지며 바이칼 호수를 향해 흰 구름을 날려 보냈다
* 분홍노루귀
♧ 불혹 - 최정란
세상 남자들이
내 젖 먹고 자란 아들 같다
꽃구름 들떠 바라본 사월 들판
잠시 가슴에 넣고 다녔던가
내 안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입덧이 들어 있었다
변덕스런 서풍이 이마를 스쳐가고
낯익은가 하면 낯선 시선이 비켜간다
서늘한 눈썹이 참나무 숲에 걸린다
수많은 상상임신 끝에 나는 마침내
많은 아들을 거느린 족장이다
누덕누덕 기운 나를 족장이라 불러다오
강 하나 건널 때마다 더 무거워지는
물 먹은 목화솜, 꽃무늬 이불을 걷어낸다
긴 헛구역질을 끝낸다
* 남산제비
♧ 멸치 - 이지담
냉장고에서 꺼낸 멸치를 다듬는다
온몸을 쥐락펴락했을 머리부터 떼어낸다
팔딱이는 바다를 휘저은 지느러미는
물결들에게 두고 왔는지 없구나
상어의 큰 입을 피해 다니며
배든 날렵함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뱃속에는 별똥별을 삼켰던 탓인지
까만 씨앗들이 슬퍼하지 않을 만큼 맺혀 있다
요 작은 몸으로 보시를 결심한 느낌표들!
바다를 놓아주고 열반에 드는가
똥들이 모여 마침표 하나 찍는데
머릴 맞대고 궁리에 골똘해 있는 머리들을 비웃듯
몸뚱이는 몸뚱이끼리 나누어 머리 위쪽에 놓는다
한 몸이었던 내 몸이 부위별로 쑤셔온다
귀가를 서두른 노을과 함께
몸이 프라이팬에서 볶아진다
* 할미꽃
♧ 소 울음 - 배경숙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밤
허공에 등을 기댄 이승처럼
나날이 완강해지는 외로움이 두려워
버거운 육신 끌고 가는 아버지
저무는 산을 향해 소 울음 운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이는 것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던 것들
가진 것 모두 헛것이 되어 떠도는 것인지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이제 그 누구의 가슴에 그 무엇도 허용하지 않을 작정이다
알고 계실까
상처가 깊을수록 갈 길은 멀고
골수 깊숙이 안개 파고들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을
* 흰괴불주머니
♬ 요한스트라우스 - 봄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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