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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주괴불주머니와 권경업님의 시

ehkoang은희광 2008. 4. 23. 22:27

 

감기를 핑계로, 보충수업을 핑계로

이번 주는 한 번도 별도봉에 가지 못했는데

오늘은 잔치 먹고 남는 시간이 있어

억지로 시간을 내어 사라봉까지 올랐다.


어느새 개구리갓과 산자고가 오름을 물들이고 있었는데

작년에 일찍 보았던 교육대학 끝자락에 이 자주괴불주머니가

일찍 피었다 지는 것도 있고 이제야 피는 것도 있어 몇 컷 찍어다 

권경업 님의 시집 ‘사랑이라 말해보지 못한 사랑이 있다면’의 시와 함께 내보낸다.


자칭 타칭 산악시인는 권경업 님의 9번째 긴 제목의 시집은

부산일보의 임성원 기자의 기사처럼 ‘산악시인의 산 밖 사랑노래’를 묶은 것.

그리고 자신의 이름처럼 그가 시를 통해 '일삼아 보는 풍경'(景業)은

백두대간을 따라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억세고 험준한 '산악'.


'사랑의 시'는 산기(山氣)를 바람에 흩날려버렸다.

백두대간을 오가며 느낀 서늘한 풍광을 구름에 가려진 햇살 잠깐 드러나듯

세상살이와 섞어 호흡하던 그의 시는 산도 버리고,

마치 '산악시인'이라는 꼬리표조차 거추장스러운 듯 벗은 서정을 내보인다.

 

 

♣ 봄은 소리다, 누군가의 - 권경업

 

봄은 소리다, 누군가의

거칠어진 마음에 새순 돋는 소리다


어쩌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눈 감고서도 훤한, 취밭목

잔설 위로 오솔길 피어오르는 소리다


아직도 못다한, 한 시절

발그랗게 얼굴 달아오르는 소리다 


여리디 여린 그 품에

얼레지, 제비꽃 꽃망울이

꽃샘바람에 터지는 소리다


귓바퀴 손 모아 다가가는

내 가슴 콩닥거리는 소리다

 

 

♣ 가수 한영애의 ‘봄날은 간다’ - 권경업

    

풀꽃 하나

제대로 못 피우는 마른 가슴

깡술 쏟아 붓는다 해서

꽃이 피겠습니까마는

한 열흘 밤낮 술만 퍼부었습니다.

서해(西海)로 설악(雪岳)으로 떠돌며

남도(南道) 어디, 혹 

다른 꽃 소식이라도 접하면 나을까 싶어

잔설(殘雪) 사이로 넘은 노고단

천은사 노오란 산수유도

내게는 부황 든 듯했고

풀린 강물 반짝이는 섬진강변

다압 마을 골짜기 가득한 매화도

한겨울 찬 눈(雪) 같았습니다.

부질없는 줄 알지만

내 안에 꽃 필 때까지가 아니고

저 매화 다 질 때까지만이라도

절망 같은 술로 견뎌보려 합니다.


벌써, 꽃 진 자리 향기 남기는

청매화 흰 꽃잎 하나둘, 저녁 어스름의

내 등 뒤로 스러지고 있습니다.

 

 

♣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 권경업

    

가버린 봄은

돌아와 다시 꽃 피운다지만

떠나간 그대는, 다시

오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두고 떠날 때

말하진 않았어도 오죽 했을 그 마음 

기꺼이 멀어져 그리움 되어준

내 삶의 소중한 한사람이여

그대와의 인연 다했다는 걸 알면서도

저 윤중로 벚꽃 봄비에 다 지도록

나는 기다립니다.


기다림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지는 꽃그늘의 쓸쓸함과

세상 숱한 설움의

견딜 수 있는 힘이겠기에

 

 

♣ 당신은 누구십니까 - 권경업

    

누구십니까

혹여 키 낮은 풀꽃 아닐런지요

겨우내 아린 꽃물 품어

보아줄 이 있건 없건

조그만 꽃부리 애써 여는 당신은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소리 낮추어 피는 감자난초 족두리풀

듣기에도 어색한 개불알꽃 고슴도치풀

이름 한 번 불릴 일 쉽지 않은 이 땅에

말 없는 노랑제비꽃

연보라 노루귀, 꿩의바람꽃

천덕꾸러기 엉겅퀴 들꽃이라도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무심히 스치는 길섶, 하찮다지만

먼지만한 씨앗으로 세상에 오던 날

하늘에는 바람, 땅에는 비 내렸습니다

척박한 땅 싹 틔워 질긴 뿌리 내리라는

그 가르침


당신은 누구십니까

 

 

♣ 사랑도 이와 같아서 - 권경업

    

발에 꼭 맞는 신발이

어디 잘 있습니까.

신다보면 때로는 뒤꿈치도 까지고

터진 물집도 갈앉고 해서 편해지면

그때부터, 먼 길이던 험한 길이던

함께 갈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나

사랑도 이와 같아서 

때로는 삐걱이고 고통스럽더라도

굳은살 앉을 때까지 참고 가야지요.


아직도, 보드랍고 뽀얗던 고 앙증맞은 발의

오래된 신발로 남고 싶습니다.

 

 

출처 : 자주괴불주머니와 권경업님의 시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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