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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림픽 대회 마스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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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림픽 대회 개막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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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림픽 기념관,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 |
대한체육회가 1979년 3월 문교부에 올림픽 유치 건의안을 제출하여 교육부에서 관계기관의 협조를 받아 충분한 검토를 거친 후 1979년 10월 8일 정상천 서울시장이 유치계획을 정식으로 발표함에 따라 서울 올림픽 대회의 유치 및 개최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1년 2월 26일 유치신청서를 국제 올림픽 위원회 본부에 접수하고 일본 나고야[名古屋]와 유치경쟁을 시작,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 올림픽 위원회 총회에서 52 대 27 표로 나고야를 누르고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당시 서울유치대표단은 총 107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공식대표는 박영수·조상호·정주영·이원경·유창순·이원홍 등 6명, 총회대표는 김택수·김운용·전상진·최만립 등 4명이었다.
대회 이념은 '화합과 전진'을 기본으로 하고 올림픽 헌장을 충실히 준수함으로써 범세계적 화합을 이루며 인류의 오랜 염원인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위해 함께 전진하는 전기로 삼고 한국의 전통문화 선양과 올림픽 운동에 활력소를 부여하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나라들에 용기를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두었다. 대회 목표는 최다의 참가, 최상의 화합, 최고의 성과, 최적의 안전봉사, 최대의 절약 등이며, 5대 특징은 화합의 올림픽, 문화의 올림픽, 복지의 올림픽, 희망의 올림픽, 번영의 올림픽 등이다. 대회운영인력은 조직위원회 직원 1,435명, 자원봉사요원 2만 7,221명, 지원요원 1만 8,281명, 단기고용요원 2,775명 등이 동원되었다. 대회물자는 2,925개 품목에 708억여 원어치가 소요되었으며 7만 3,000여 명에게 65만여 점의 유니폼이 공급되었다. 경기시설은 경기장 34개, 연습장 54개, 관련시설 4개 등 모두 92개소가 활용되었다. 경기장은 서울종합운동장, 올림픽 공원 및 기타로 구분되었으며 서울종합운동장에는 올림픽 주경기장, 잠실수영장, 잠실체육관, 잠실학생체육관, 잠실야구장 등 5개 경기장이 포함되었다. 올림픽 공원에는 사이클·펜싱·체조·테니스·역도·수영 등 6개 경기장이 포함되었고, 기타 경기장으로는 화랑양궁장, 서울승마공원, 원당종합마술경기장, 동대문운동장, 새마을체육관, 장충체육관, 로열 볼링 센터, 근대5종경기장, 대전공설운동장, 광주무등경기장, 대구시민운동장, 부산구덕운동장, 수원실내체육관, 성남공설운동장, 한강조정 카누 경기장, 태릉국제사격장, 서울대학교체육관, 한양대학교체육관, 상무체육관, 부산 요트 경기장, 마라톤 코스, 경보 코스, 도로 사이클 코스 등 23개소가 활용되었다. 경비는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를 포함하여 직접비 7,477억 원이 소요되었는데 조직위는 텔레비전 방영권판매, 복권사업, 기념주화, 메달 판매, 휘장사업, 광고사업, 입장권판매, 선수촌 및 기자촌 입촌비, 아파트 분양에 의한 기부금 및 성금 등으로 자체 조달에 노력해 3,414억 원의 흑자를 남겼다.
경기내용은 올림픽 12년 만에 160개국 1만 3,304명의 동서양 진영 선수단이 참가하여 육상경기를 비롯한 23개 정식종목과 237개 세부종목으로 진행되었으며, 야구·태권도·배드민턴·볼링 등은 시범종목으로 개최되었다. 결과는 세계신기록 33개, 세계 타이 기록 5개, 올림픽 신기록 227개, 올림픽 타이 기록 42개 등 각종 신기록 307개가 수립되었다. 세계신기록은 수영과 역도에서 각각 11개, 육상에서 4개, 사격에서 3개, 사이클과 양궁에서 각각 2개가 나왔다. 사격의 3개, 역도·육상에서 각각 1개씩의 세계 타이 기록이 나왔으며, 올림픽 신기록은 역도에서 85개, 육상에서 42개, 사격에서 37개, 수영에서 34개, 양궁에서 29개가 세워졌다. 개인선수로는 역도 60㎏급에서 터키의 나임슐레이마놀루 선수가 6개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했고 동독의 여자수영선수 크리스틴 오로 선수는 6관왕을 차지했다. 미국의 남자수영선수 매트 비온디는 5관왕, 소련의 체조선수 블라디미트 아르테모프는 4관왕을 차지했으며 미국의 여자육상선수 그리피스조이너 등 4명이 3관왕, 한국의 여자양궁선수 김수녕 등 27명이 2관왕을 차지했다. 국가별 메달 순위에서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로 1위를 차지했으며, 동독이 금메달 37개, 은메달 35개, 동메달 30개로 2위, 미국이 금메달 36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27개로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4위를 차지했으며 이어 서독·헝가리·불가리아·루마니아·프랑스·이탈리아 등이 5위에서 10위를 각각 차지했다. 한국은 레슬링에서 자유형 82㎏급 한명우와 그레코로만 74㎏급의 김영남, 유도에서 엑스트라라이트급의 김재엽과 하프라이트급의 이경근, 양궁의 남녀단체와 여자개인의 김수녕, 여자 핸드볼, 탁구여자복식의 양영자·현정화 조와 남자단식의 유남규, 복싱 플라이급의 김광선과 라이트미들급의 박시헌 등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성화는 1988년 8월 23일 그리스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에서 수석여사제 카테리나 디다스칼루에 의해 채화되어 그리스 국내봉송을 거친 후 8월 25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김용래 서울시장에게 인도되어 타이의 방콕을 거치는 항공로에 의해 제주로 운송되었다. 제주를 기점으로 한 국내봉송은 전국 21개 주요도시를 거치는 총거리 4,167.8㎞인 1,595구간에서 주자 1,467명, 부주자 2,782명, 호위자 1만 6,640명에 의해 21박 22일 동안 주자봉송, 선박봉송, 차량봉송, 승마봉송, 사이클 봉송, 오토바이 봉송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실시되었다. 개회식은 1988년 9월 17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화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졌다. 식전행사·공식행사·식후행사로 나뉘어 열린 개회식은 대회이념과 아름답고 씩씩하고 평화스러운 한국문화의 참모습을 고유의 춤과 소리와 색채로서 다양하게 표현한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폐회식은 10월 2일 오후 7시부터 90분 동안 공식행사·공연행사로 벌어졌다. 개·폐회식에는 남녀 초·중·고·대학생을 비롯한 전문단체·군인·외국인 등 1만 7,079명이 출연했으며, 행사용품만도 의상 90종 3만 9,613벌을 비롯하여 소품이 352종 24만 958점 투입되었다. 각 종목별 입상자에 대한 시상식은 12개 팀 358명의 이동시상 팀에 의해서 27개 종목경기에서 270회가 거행되었으며 수여된 메달수는 금메달 580개, 은메달 570개, 동메달 628개였다.
선수촌·기자촌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62만 6,664㎡의 부지 위에 6층에서 24층의 건물로 86동 3,692세대 및 36동 1,848세대가 각각 건립되었다. 대회 입장권은 443만 5,505매가 판매되어 275억 원의 입장수입을 올렸다. 대회기간중에 동원된 보도진은 123개국 1,453개 언론사의 4,933명으로, 무역회관에 설치된 480석의 공동기사 작성실과 115개 개별사무실의 메인프레스 센터를 중심으로 열띤 취재활동을 벌였다. 수송시설로는 3,355명의 인력과 2,401대의 차량이 동원되었고, 의무시설로는 경기장의 31개 선수진료실, 선수촌과 행사장 외 13개 의무실 및 42개 지병원에 1,952명의 의료진이 투입되어 3만 613명을 진료했다. 문화예술행사로는 경축행사·공연행사·전시행사가 열렸으며 스포츠 과학학술대회도 열렸다. 경축행사로는 한강축제를 비롯하여 청소년축제·지구촌축제·거리축제 등이 포함된 서울축제가 열렸으며, 공연행사로는 서울국제무용제·서울국제연극제·서울국제음악제·전통예술축제 등이 열렸다. 전시행사는 서울미술대전, 서울문화재특별전, 올림픽 기념종합전, 세계현대미술제 등이 함께 열렸다.